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라곤 왕국 (문단 편집) ==== [[라미로 1세]] ==== 아라곤 왕을 처음으로 자처한 '''[[라미로 1세]]'''는 1043년 자신이 가진 영역을 확장하거나 이복형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가 소유한 팜플로나 왕위를 빼앗을 의도를 품고 사라고사, 투델라, 우에스카 등 무슬림 토후국들과 함께 팜플로나로 쳐들어갔다.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는 카스티야 백작이자 레온 국왕 [[페르난도 1세]]와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했다. 양측은 타팔라에서 맞붙었고, 가르체아 3세-페르난도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가르체아 3세는 수많은 무기와 보급물자를 노획했는데, 그 중 라미로가 타고 다녔던 검은 말을 노획해 자신에게 바친 알페레스(alférez: 중세 이베리아의 왕실 고위 관리) 오르티 사노이츠에게 오로비아 마을을 하사했다. 타팔라 전투에서 완패한 뒤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자의 국왕을 맡고 있던 형제 온잘루 사노이츠에게 피신한 라미로는 얼마 후 온잘루가 사망하자 그 땅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후 계모 무나이도나의 중재 하에 가르체아 3세와 화해하고 아라곤 백작으로 복귀했다. 1054년 페르난도 1세와 동맹을 맺고 무슬림들과 연합하여 카스티야를 침공한 가르체아 3세에 대적했다. 양군은 아타푸에르카 계곡에서 맞붙었는데, 전투 도중에 가르체아 3세가 전사했다. 다만 팜플로나군은 해질 무렵까지 전투 대열을 유지했고, 왕의 시신을 수습한 뒤 팜플로나로 이송하여 안장했다. 그 후 팜플로나 왕국의 서쪽에 있던 많은 영주들이 페르난도에게 귀순했다. 이에 가르체아 3세의 뒤를 이어 팜플로나 왕위에 오른 안초 4세는 때마침 아라곤 왕을 칭하고 있던 라미로와 동맹을 맺고 페르난도와 대립했다. 한편 바르셀로나를 거점으로 삼고 세력을 키워가는 카탈루냐 백작 라몬 베렝가르의 위세가 갈수록 강해지자, 라미로는 위협을 느끼고 딸 산차와 우르겔 백작 에르멘골 3세를 결혼시키고, 아들 산초 라미레스를 에르멘골 3세의 딸 이자벨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이리하여 우르겔 백국과 아라곤 왕국은 이중 결혼 동맹을 맺었고, 라미로는 이를 토대로 카탈루냐 백국을 몰아붙여 라구아레스, 라스콰레, 카펠라, 카세라스, 팔체스, 루자스, 비아캄프, 베나바레 등지를 공략할 수 있었다. 1055년, 라미로는 신카 계곡의 최북단 무슬림 전초기지인 그라우스를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063년에 다시 그라우스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사라고사 토후국이 고용한 용병대장 [[엘 시드]]가 300명의 기사들과 함께 그라우스로 달려가 포위를 풀려 했다. 1063년 5월 8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라미로 1세는 엘 시드가 내지른 창에 찔려 그라우스 성문 앞에서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산 후안 데 라 페냐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아들 [[산초 라미레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라곤 국왕에 즉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